먹는 것을 엄격히 가리도록 하는 종교적 계율이, 개신교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면이 있다(다만 일부 종파에 따라 금주 등을 강조할 따름이고, 다수의 개신교인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거나 적당히 타협한다).

..간디 자서전 중에는 간디가 힌두교 신앙을 지키려고 거의 죽기 직전까지 (의사의 권고에 따른) 우유섭취를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우유대신 산양의 젖을 취하여 목숨은 구하는데, 나중에 간디는 이를 두고 신앙적 계율의 문자는 지켰으나 그 정신에 위배되었다면서 크게 자책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먹는 것 문제에서 자유로운 개신교인 입장에서 볼 때,이러한 장면은 다소 이해하기 어렵고 어리석은 것으로까지 비칠 수 있다-로마서에서도 유대교에서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과 계율이 몸에 남아 음식을 가리던 것에 관하여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이 이를 어리석다 여겼던 정황이 나타난다.

그러나 하루 하루 수용하는 input이 집적되어 그 개인을 구성하게 되고, 그렇기에 온전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유익적 input을 극대화하고 무익적/유해적 input을 0으로 수렴시켜야 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먹는 것을 가리는 것과 같은 기초적 계율은, 비록 그것이 눈으로 보기에 직접 어떤 윤리적, 사회정의적 사항의 성취와 관련성이 적어 보인다 할지라도, 최소한 거기에서 무익적/유해적 input을 최대한 차단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무익적 input의 수용은 결국 그 시간과 기회에 다른 유익한 input을 얻지 못했다는 기회비용적 손실-즉, 법학에서 말하는 소극적 손해-로 귀결되고, 그렇다면 input은 결국 유익하냐 유해하냐로 이분될 따름이다.

..30대에 이르러 시간의 흐름이 몹시 빨라짐을 느껴 왔다. 지난 20대의 순간들과 최근까지도,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토록 터무니없이 시간을 허비할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과거에는 어리석어 보였던 종교적 계율들이, 지금의 내게는 ‘결코 삶의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새롭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