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의 유명한 종교개혁가 루터는 법률가 출신입니다. 그는 어느 날 동행하던 친구가 벼락을 맞고 세상을 떠난 사건을 체험하면서, 보다 신앙적으로 깊이 천착하며 결국 오늘의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가로 변모하게 되었는데요, 법률가로서 그가 남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여 오늘날의 법조인에게도 유효적절하게 적용된다 하겠습니다.


 


즉, “단지 법률가이기만 한 법률가는 오직 불쌍한 존재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대다수의 많은 각국 사회에서 법조인 직역은 대체로 상당 부분 사회적인 부와 명예로 연결되어지고는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부, 명예의 추구를 떠나서도, 공익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정말로 유의미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법조직역의 일이란 사법(司法)의 본질적인 한계상, 그 자체로는 대체로 과거회귀적이고, 창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즉, 앞으로 무엇을 해 나간다기 보다는, 이미 과거에 발생된 일에 대하여, 법률의 frame에 맞춰 이를 재단하고 따져 나가는 것이 사법의 base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요새와 같은 법조인 inflation 시대를 맞이하면서, 변호사 자격 역시 그것을 토대로 앞으로 무언가를 시작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자격에 불과한 것으로 점차 변화될 것 같습니다(실제로 lawschool에서는 스스로도 이런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말을 남긴 루터의 의도나 관점과는 다른 것이겠지만(다분히 본질적이고 종교/철학적인 의미이겠지요), 현실/세속적인 의미에서도, 정말 단지 법률가이기만 한 법률가는 사회/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안타까운 입장이 되기 쉬울 것입니다.


 


저도 변호사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변호사로서 전문성 제고(즉, 법리적 전문성과 법리를 적용할 fact 영역과 관련된 전문지식의 습득), 시장성 확보를 위한 노력의 끝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다 보면, 그 과정 자체에 빠져서 그만 그 일의 종국을 잊어버리거나 애써 외면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일 줄도 모르겠구요(흔히들 살다보면 사는 것 자체에 몰두하고, 치이고, 지쳐서 그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마저 놓치기 쉽잖아요?). 변호사로서 자신을 연마하고 개발하는 것을 극대화할 때 이르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에서처럼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just lawyer가 아닌, beyond lawyer가 될 수 있도록 늘 탐구하고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